`입양아들의 수호천사` 포토그래퍼 조세현
입력 : 2009.12.05 03:13 / 수정 : 2009.12.06 14:53
"찍는 자와 찍히는 자, 눈으로 말을 해야죠"
"아이들 자란 후에도 기념 될만한 사진을 선물하고 싶었죠… 그래서 스타도 동참"
"아기가 운다고 그냥 간 장관도 있었죠"
"인물사진, 모델이 잘해줘야… 배우는 감정을 못숨기지만 그걸 다스려주는게 사진가"
"어려운 사람 찍게된 동기?… 사진 한 장만으로도 너무들 행복해하니까요"
광화문 거리에 구세군 종소리가 낭랑합니다. 울긋불긋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밤거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앞 나목(裸木)도 어느새 은빛 전구로 치장했군요. 이 아름다운 계절, 우리의 아기들이 한국을 떠납니다.
20만명, 1958년부터 작년까지 우리나라를 떠나 외국의 부모 품에 안긴 해외 입양아(入養兒)들 숫자입니다. 올해도 연말까지 '1000+알파'라는 숫자가 거기 더해지겠지요. 그 가운데 70%는 미국으로 간다고 합니다.
무책임한 부모 때문에 국내외의 낯선 곳에서 새 삶을 살게 되는 아기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희미한 보모(保姆)의 뇌리 속 기억도 다른 아기가 오면 가을바람이 쓸고 간 낙엽(落葉)처럼 스러질 겁니다.
그 중 130명이 사진으로 남았습니다. 조세현(曺世鉉·51)이 2003년부터 이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사진 한장이 뭐 대수랴'하고 생각하시나요? 그것은 아기들이 이 땅에서 태어나고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 ▲ "아가야, 네가 태어난 나라를 기억하렴." 바다 건너 새 부모를 찾아 떠나는 천사들…. 그들에게 조세현은 '마지막 선물'을 건넨다. 얼굴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는 유명인들이 사진 속에서 130명의 아이들을 꼭 껴안고 웃 고 있다. 그것은 아이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마지막 증거다. / 조세현씨 제공
당시 변호사였던 오세훈, 지휘자 정명훈, 배우 권상우, 가수 인순이, 장애인체육회장 장향숙, 탁구선수 유승민이 기꺼이 아이들을 안았습니다. 오 시장은 그들의 처지를 보고 광고 출연료 전액을 기탁하기도 했습니다.
"10년만 해보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한 조세현의 이 일이 벌써 7년이 됐습니다. 아기들의 그야말로 천사 같은 모습이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 2층에 걸립니다. 16일부터 22일까지라고 하는군요.
전시회 타이틀은 '천사들의 편지 7th'. 흑백 필름 속에서 빛을 받아 인화된 아기들의 웃는 얼굴은 천사 같습니다. 그 어떤 부잣집 아이들 못지않게 넉넉합니다. 평화롭습니다. 귀엽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스럽습니다.
1999년까지 저는 스타와 유명인만 찍었습니다. 2000년이 제 삶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지금은 대구 본리성당에 있는 외삼촌 요한 배임표 신부(神父)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내가 들꽃마을에 있는데, 잘난 사람만 찍지 말고 불쌍한 사람들 가족사진 좀 찍어줘…." 들꽃마을은 경북 고령군 우곡면에 있습니다. 그 낙동강 가에서 불우한 사람들이 연령별로 '가족(家族)'으로 살고 있습니다.
2000년 6월 어느 날 새벽 그곳으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그들과 같이 밥 먹는 것조차 힘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다가오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런데 하룻밤을 함께 자고 일어난 새벽,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제 친구처럼, 인간처럼 보인 겁니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奇跡)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스무 가족을 촬영했습니다. 사진 한 장에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들은 제게 무한한 믿음을 보내줬습니다. 제가 자신들을 최고로 잘 찍어줄 거라고 생각하며 카메라를 향해 거침없는 신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진 한 장으로 그들은 혈연(血緣)보다 더 단단한 가족이 된 것 같았습니다.
서울의 한 자폐아 보호시설에선 이런 경험도 했습니다. 자폐아가 사진기를 보더니 그렇게 신기해하고 좋아하는 겁니다. 나중에 어머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이에게 사준 한 대의 사진기가 마음을 열었습니다…."
아기들은 대개 생후 3개월 때 입양을 갑니다. 제가 찍는 사진은 아기들의 백일(百日)사진이 되는 셈이지요. 제 자랑 한번 할까요? 제가 찍은 아이들은 입양률이 90%입니다. 우리나라 입양률은 50% 정도인데….
그는 한국에서 가장 빨리 사진촬영을 하는 포토그래퍼라고 한다. 이른바 '속사(速寫)'다. 사진만 빨리 찍는 게 아니라 질문을 이해하는 속도도, 말하는 속도도 빨랐다. 검은 개는 이야기가 시작되자 침묵했다.
―처음부터 전시를 목적으로 촬영한 건 아니지요.
"대한사회복지회에서 연락받고 촬영한 게 9월입니다. 모두 36명이었어요. 10월에 사진을 보내드렸는데 11월에 연락이 왔습니다. '사진이 너무 예뻐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하고 싶다'고. 그게 언론에 알려지면서 관심도 커졌지요."
―스타들을 등장시킨 이유는 뭡니까.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사진을 볼 때 뭔가 기념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스타들을 동참시키는 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광고하려고 일회용으로 한다'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분들이 많지요. 2~3년 지난 뒤부터 그런 오해들이 서서히 풀려가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누가 제일 열성적으로 참여합니까.
"김정은, 정혜영, 션. 그들은 아동기관의 홍보대사이기도 하지만 여러 차례 촬영에 응했습니다. 사실 많은 스타들이 처음에는 '잠깐 시간 내지'하는 기분으로 와요. 그런데 막상 와서 보면 한시간 두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아기들이 잘 때도 있고 보챌 때도 있으니까요. 기저귀도 갈아주고 하면서 정(情)이 든대요. 옆에서 매니저들이 '다음 스케줄에 가야 한다'고 보채도 못 들은 척하지요."
―그래도 촬영 한 번 하고 나면 싹 잊는 거 아닌가요?
"배우 권상우는 나중에 불우한 어린이들을 위한 재단(財團)을 꼭 만들겠다고 했어요. 가수 김장훈 같은 경우는 시간이 나면 꼭 와서 아이들과 놀아주지요. 김장훈이 하고 있는 유소년 축구도 그때 경험에서 생겼다고 합니다."
―왜 10년만 이 일을 하겠다고 생각한 겁니까.
"처음에는 저도 긴가민가했으니까요. 촬영에 임하는 배우, 탤런트, 가수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같이 촬영한 이 아기들과 10년 뒤에 꼭 다시 찍자'고요. 요즘 인기 있는 G드래곤에겐 이런 말도 했어요. '10년 뒤면 너도 중견(中堅)가수가 돼 있을 거 아니냐'고요. 웃더군요."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도 촬영했군요.
"참 성실하게 아이들을 안아줬습니다. 아기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어떻게 안아주면 아기가 더 편할까 물어보기도 하고요. 그때 박 의원이 안아준 아기 이름이 세현이입니다. 당시 박 의원의 동생 박지만씨 아들이 태어났을 때인데 조카 이름도 세현이였고요. 그래서 제가 농담을 했지요. '세현이가 3명 있습니다'라고요."
―모두가 그렇게 다 성실히 응합니까.
"이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현직 장관 중 한 분이 왔다가 7분 만에 간 적이 있어요. 흰색 티셔츠로 갈아입고 나와서 아기를 안으려는데 아기가 우니까 인상을 팍 쓰더니 그냥 가버리더군요."
―그 못된 장관이 ○ 아닌가요.
"어휴, 자꾸 묻지 마세요."
―그럼 혹시 ○?
"(맞지만 이름은 비공개로 해달라면서) 그분의 이미지가 전혀 그렇지 않았잖아요. 저도 놀랐지만 그 아기를 데려온 보모도 너무 서운해했어요. 8개월 된 아기인데 지방에서 왔어요. 사진 촬영한다고 머리까지 다듬고 왔는데…. 아기한테 제일 미안하고 보모 두 분에게도 미안하더군요. 이 작업을 한 지 7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었어요. 그 아기는 결국 사진촬영을 하지 못했습니다."
- ▲ 조씨의 사진에는 따뜻한 시선과 여유가 느껴진다. 사진 속 그의 모습이 그가 한때 되 고싶던 '히피'의 모습 같다.
―왜 사진을 컬러로 찍지 않고 흑백필름으로….
"아기들 피부는 컬러로 촬영하면 뭐랄까 공감(共感)을 얻기가 힘들어요. 어른들은 약간 노랗게 나오는데 아기들은 붉게 나오거든요. 흑백필름을 쓰면 느낌이 달라지지요. 그래서 갓난아기들은 주로 흑백필름으로 작업합니다. 카메라는 중형(重型)을 쓰고요."
―한번 촬영한 아이들이 다음에 만날 때 기억을 하던가요.
"그럼요. 그런 기억력은 또렷해요. 제가 가면 막 달려나와 안기기도 하고 그래요."
2007년 5월 조세현은 미국 플로리다에 갔다. 한국의 아기들을 입양한 미국 가정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그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만났다.
푸른 눈의 새 부모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실제로 그가 촬영한 130명 가운데 2명은 입양됐다가 다시 버림받았다. 그 중 한명은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는데 다시 미국으로 재입양되기도 했다.
―그중에 직접 촬영했던 아기들은 몇명이었습니까.
"열두 가족을 만났는데 그중 다섯명이 제가 촬영한 아기들이었어요. 그 촬영을 마치고 아프리카로 갈 계획이었는데 아기들이 돈을 모아 사파리 모자 하나를 선물해줬어요."
―기분이 어떻던가요.
"사실 열세 가족이 나왔습니다만, 그 아이의 양부모는 사진촬영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 나쁜 영향이 있을까 우려했던 모양입니다. 플로리다에서 두 다리 없는 아이들이 의족(義足)을 끼고 축구하는 모습을 봤어요. 전 울었지만 아이들의 얼굴에 사랑이 충만해 있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촬영한 아기들이 다 좋은 양부모를 만났나요?
"2003년에 찍은 유희(가명)는 입양된 지 8개월 만에 파양(罷養)이 됐습니다. 시각장애인인 걸 그땐 몰랐는데 나중에 알게 된 거지요. 이 사진 보면 너무 예쁜 아이죠? 지금은 시각장애인 재활센터에 있다가 특수시설로 옮겨졌어요. (사진을 가리키며) 이 아이도 국내의 한 가정에 입양됐다가 파양됐어요. 근육이 마르는 병이었는데 열두살까지 밖에 못산다는 질병이랍니다."
―왜 그렇게 불쌍한 아이들이 많습니까.
"그런데 다행히도 두 번째 아기는 해외로 입양이 됐어요. 작년에요. 그 양부모들은 모든 것을 알면서도 아기를 데려갔습니다. 기적이지요."
―7년째 이 일을 해오며 입양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전시회에는 해마다 입양가족도 등장합니다. 그만큼 과거와 달리 입양에 대해 자신감도 생기고 아이들도 입양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됐다는 증거겠지요."
―재작년부터 해외입양보다 국내입양 숫자가 더 늘었습니다. 어떤 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까.
"입양보다는 생모(生母)가 아기를 키우는 게 그래도 제일 낫다고 봅니다. 부득이하면 가장 빨리 새 가정을 만나게 해주는 게 차선이고요. 전 이런 의미도 둬요. 촬영을 하면서 유명인들에게 제가 새로운 기회를 한번 주는 게 아닌가 하는. 그들이 세상을 보는 눈도 작은 일이지만 달라질 게 아니겠어요. 국내입양과 해외입양…, 흠, 전 아직 해외입양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왜요?
"해외입양 절차가 국내입양보다는 훨씬 까다롭습니다. 조건을 느슨하게 해주면 입양률은 높겠지만 조건이 강화될수록 아기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고 보니까요."
―아이들은 언제 행복할까요.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촬영할 때 어느 부잣집 아이가 부모를 잃고 미아보호소에 30분간 있었던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있어도 아버지, 어머니를 다시 못 볼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고 있는 아이가 무척 초라해보였어요. 새 가족을 만난 입양아들의 넉넉함이 그때 제 마음속에 오버랩되더군요."
―지금까지 조세현 하면 연예인 얼굴 찍어주는 걸로 이름 날린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한 달 전에는 이주(移住)여성 서른네 가족과 태국도 다녀왔군요.
"이주여성들 친정의 삶을 촬영하려는 목적이었지요. 인원이 120명 가까이 됐습니다. 여성재단 조형 이사장과 함께 다녀왔어요. 국제구호기관과도 2006년부터 아프리카 기아(饑餓)아동돕기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탤런트 김혜자 선생님과 케냐, 탄자니아, 세네갈을 다녀왔지요. 장애인체육회와도 일을 함께 합니다."
―장애인체육회와는 왜?
"사실 저희 집안에도 장애인이 두 명 있어요. 매제와 조카. 장애인들의 최고 목표는 스포츠입니다. 정상인들처럼 뛰고 던지고 하고 싶거든요. 장애를 입으면 몸을 숨기려 하는데 그걸 극복할 수 있는 게 스포츠잖아요."
―이런 일들을 하면 솔직히 돈벌이는 안되지요?
"돈 생각하고 하는 건 아닙니다. 돈은 달리 벌면 되지요. 절 찾아왔는데 어떻게 거부하겠어요. 도와줘야지요. 불우한 아이들은 가족사진 한장 없는 경우가 많아요. 전 그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진첩을 만들어주지요."
조세현의 꿈은 법조인이었다. 그랬던 그의 운명이 대구 대륜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방향을 틀었다. 땅에 떨어진 한 장의 필름을 주워와 이불 뒤집어쓰며 인화해본 것이다. 그게 너무도 신기했다.
서울 중동고로 유학온 그는 고2 때 황당한 일을 겪었다. 선배들에게 빌려준 사진이 서울시 고교생 사진대회에서 1, 2등을 휩쓴 것이다. 정작 자기가 낸 것은 3등을 했다. '재능'이라는 송곳은 감출 수 없는 법이다.
―부모님이 난리가 났겠군요.
"사진하면 사진관을 떠올릴 때였으니까요. 대학 4년 동안 등록금을 한 푼도 대주지 않았습니다. 1, 2학년 때는 청량리 쪽에서 수학학원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했고 3학년 때부터는 사진 일로 아르바이트를 했지요."
―법조인을 꿈꾸다 사진학과(중앙대)에 진학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을 텐데.
"입시원서 쓰기 전 중대에 갔다가 교수님을 만났어요. 지금은 돌아가신 임응식 교수님이었습니다. 그분은 제게 '무엇을 하더라도 자기 적성에 맞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어요. 그 말에 따랐습니다."
―과거 중동고에는 주먹 센 학생들이 많았는데.
"주먹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로맨티시스트라고 할까? 대학에 가서는 머리 기르고 고무신 신고 다니고 해괴한 차림이었지요."
―지금 이미지하고는 영 딴판입니다.
"그땐 그랬어요. 히피가 되고 싶었다고나 할까."
―남들은 보통 카메라를 통해 사진을 알게 되지요.
"만일 그랬다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겁니다. 필름을 먼저 알게 되면 카메라의 종류에 관계없이 사진에 대해 알게 되지요. 지금도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촬영이 전부라는 겁니다."
―그게 왜 오해인가요.
"촬영은 빙산(氷山)의 일각에 불과해요. 촬영 후 이뤄지는 게 80%가 넘습니다. 그걸 중학교 때 필름을 만지작거리며 미리 배우게 된 거지요."
―졸업 후 잡지사 기자를 했지요? 주부생활에서.
"당시 사진학과 학생들의 진로는 두 가지였어요. 다큐멘터리와 순수사진. 전 다큐멘터리가 좋았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라이프지(誌) 같은 곳에서 활약하는 사진기자가 제 꿈이었지요."
―그런데 왜 여성지를?
"당시 주부생활은 완전한 여성지가 아니고 다큐멘터리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줬어요."
―다큐멘터리가 좋으면 신문기자를 하지 않고….
"어디인지 밝히긴 그렇지만 신문사에 입사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저와는 맞지 않더군요. 하루하루 마감하는 게 너무 힘들기도 했고요."
―주부생활에서 1983년부터 92년까지 일했지요. 그때부터 인물사진에 관심이 있었나요.
"다큐멘터리 칼럼이 있었어요. '조세현의 눈' 이런 제목이었지요. 월남(越南) 난민수용소, 탄광촌 같은 곳을 취재했는데 저는 주로 인물 위주로 촬영했어요. 그것 때문에 데스크로부터 혼나기도 했습니다. '왜 이렇게 찍었느냐'고."
―뭐라고 항변했습니까.
"제 생각은 달랐어요. 사람을 통해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잖아요. 세상에는 다양한 피사체(被寫體)가 있지요. 생동하는 자연, 아름다운 풍경, 근사한 건축물…. 하지만 찍는 자와 찍히는 대상 사이에 교감이 가능한 피사체는 오직 사람뿐입니다."
조세현은 유명인, 특히 연예계 스타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포토그래퍼로 분류돼왔다. 그런 그가 최근 '조세현의 얼굴'(앨리스)이라는 책을 냈다. 이번에는 중국 서안(西安)에서 만난 평범한 중국인들이 등장한다.
책은 이렇게 끝난다. '골목 어귀에 매달린 새장,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길, 길가에 피어 있는 접시꽃, 오래되고 소박한 구둣가게, 거리에 비친 내 그림자… 내 눈에 비친 풍경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았던 카메라.'
―유명인들과는 언제부터.
"잡지가 흑백에서 칼라로 바뀌는 시대가 왔습니다. 제가 인물을 주로 다루니 커버 인물 촬영을 맡게 됐는데 나중에 그 배우들로부터 좋은 평가가 전해지니까 계속 그 일을 하게 됐지요."
―누구였습니까.
"이보희, 장미희, 유지인, 김미숙 같은 배우들인데 지금도 다들 친하게 지냅니다."
―여배우들이 도도하고 까다롭지 않나요.
"전 사진을 굉장히 쉽게 찍어요. 책을 많이 보고 어떻게 찍을지 콘셉트를 정확히 잡아놓고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럼 쉽게 끝나죠. 제가 연출력이 조금 남다른 편입니다."
―어떤 게 남다른 연출력입니까?
"인물사진은 제가 아니라 모델이 잘해줘야 해요. 어떻게 하든 모델이 제가 원하는 표정을 짓게 해야 하는데 전 상대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줘요. 배우도 감정이 있기 때문에 감정을 못 숨깁니다. 그걸 다스려주는 게 사진가가 할 일이지요. 전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이든 존경을 하는 편입니다."
―어떤 사진가들은 조금 기괴하다고 할까, 요란법석을 떨기도 하는데.
"전 순식간에 끝내요. 액션도 많지 않아요. 인물사진은 상대적으로 유기적인 편입니다. 한명을 10명의 사진작가가 찍으면 다 다르게 나옵니다. 모델이 사진가를 바라보는 감정이 다 다르니까요. 속으로 그러지 않겠어요? 쟤는 왜 저렇게 못생겼지, 쟤는 남자고 여자고 하는 식으로. 그러니 표정이 다 다를 수밖에요."
―보통 사진촬영을 할 때 카메라를 보지 말고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라고 하는데 조세현씨는 카메라를 보라고 하네요.
"제가 카메라를 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제 눈을 보라는 겁니다. 사람이 눈을 피하면 어떻게 서로를 알겠어요. 서로 이야기하려면 진짜로 눈을 마주쳐야지요. 그래서 카메라를 봐달라고 하는 겁니다. 눈에는 그 사람의 표정이 다 담겨 있거든요."
―인물사진을 그렇게 찍었으니 관상(觀相)도 볼 줄 알겠네요.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실제로 관상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두 달 정도 독학으로요."
―평론가들에 따르면 조세현의 사진은 따뜻하다고 하는데 '따뜻한'게 뭡니까.
"더 정확히는 그림자(shadow)가 따뜻하다는 것인데 그건 조명과 렌즈의 선택에 달린 겁니다. 그게 노하우라면 노하우고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거지요. 인터넷에 '조세현 조명(lighting)' '조세현 렌즈'라는 말이 있어요. 전 밝기가 1.2에 85~105㎜ 렌즈를 많이 써요. 한 렌즈회사 직원이 그러더군요. '조 선생 덕분에 렌즈 많이 팔았다'고."
- ▲ 조씨가 최근에 낸 책인 '조세현의 얼굴'. 그는 어깨에 카메라를 메고 중국 서안(西安)을 내달렸다.
"장점은 같이 유명세를 탈 수도 있는 것이고 나쁜 경우는 유명인에게 흡수될 수도 있지요."
―누구와 친합니까.
"고소영, 이영애, 손예진, 한예슬, 김혜자 선생님, 노영심, 김희애…."
―왜 그리 여자들이 많습니까?
"이승기, 김장훈, 이문세, 박용하, 이병헌과도 친해요. 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사진들이 있어요. 신뢰가 사진가에겐 중요합니다. 전 신뢰가 깨진 경우는 별로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