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혜: 왕이나 왕비의 행차 시 말을 끌거나 의장구를 잡는 낮은 신분의 관원들이 착용하거나 병방의 장사들이 착용한 신이다. 반면 조선시대 후기에는 사대부들 이 평상복에 갓을 쓰고 운혜를 당혜와 함께 신는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궁중 발기에는 운혜가 여혜(女鞋)로 기록되어 시대적인 변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흑혜, 흑피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착용하나, 남자의 것은 신코가 넓고 뒤축이 높은 신 형태로 조선시대 말기에는 유생들의 보편적인 신으로 착용하였고, 여성용은 신코가 뾰족하고 높은 형태로 되어 있다. 
*태사혜: 조선조 중기부터 사대부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던 신으로 태평시대를 상징하는 멋을 부린 신이었다. 
*온혜: 안창에 융이나 담을 대어주어 따뜻하게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짚신과 미투리: 짚신은 삼한 시대부터 서민들이 즐겨 신던 신으로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 형태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번 변천되어 왔다. 닥나무를 주재료로 하는 미투리는 중인이 가장 많이 신었던 신이라고 한다. 
*목극: 나막신으로도 불리는 목극은 우중(雨中)에 남녀 모두가 착용하였다. 
*유혜: 비단을 사용치 않고 가죽만을 사용하는데 가죽에 기름을 먹여 물이 새지 않도록 하였다. ‘혼신의 힘’으로 5대째 가업의 맥을 잇고 있는 황해봉 선생화혜장 기능보유자인 황해봉 선생은 1952년 10월 12일 생으로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에서 태어나 중학교 이후 어깨 넘어 할아버지(최초 중요무형문화재 화장(靴匠) 기능보유자인 황한갑선생)의 작업 모습을 계속 보고 자라왔다. 1967년 홍익전문대학 공예과를 입학하여 1년 수료하였다. 본격적으로 할아버지의 일을 전수받기 시작하였던 것은 1973년 군대 제대 후부터이며 현재까지 40여년을 전통신 제작 일에 열정을 바치고 있다. 특히 황해봉 선생의 집안은 화장 기능보유자인 조부 황한갑 선생뿐만 아니라 고조부인 황종수 선생을 비롯하여 증보부인 황의섭 선생, 증백조부인 황인섭 선생, 부친인 황등용 선생으로 이어지는 5대의 화장 가문이라 할 수 있다. 이 가문은 종로구 인사동과 지금은 청계천인 수표교와 초전골(현 을지로 5가)을 오가며 신을 만들었다. 수요가 많지 않았던 70년대 초반에는 주로 박물관이 주요 판로였다고 한다. 80년대 이후 복고풍이 불어 잠시 제작 형편이 좋아졌고 올림픽이 있었던 86년과 88년 즈음이 가장 호황기였다고 한다. 그 무렵까지는 수를 놓은 신이 많지 않았는데 차츰 수혜(繡鞋)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수를 수놓는 장인에게 부탁하여 ‘꽃신’이라는 명칭으로 제작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전에는 ‘갖신’이라 불렀다고 한다. “꽃신의 묘미는 곡선을 그리며 날렵하게 올라간 신발코에 있습니다. 인체공학상 평평한 신발은 코의 곡선을 따라 앞으로 걸을 때 벗겨지지 않고 나아가게 됩니다. 왼쪽 오른쪽 구별이 없는 듯 하지만 조금 신다 보면 발모양이 나서 제짝이 생겨납니다. 우리의 전통신은 사람이 신에 맞추는 게 아니라 신이 발 모양에 맞게 서서히 변하면서 사람에 맞추어 가는 게 특징이죠.” 신 제작의 성수기는 결혼 시즌인 3월과 4월 사이이며 주로 아동용과 신부용이 많았다. 그러나 그 수가 한 달에 10켤레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전통신을 제작하는 장인의 위치에 있었던 선생도 생계를 위하여 청년시절 신발 제작을 잠시 놓았다고 한다. 영세한 작업환경과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가장으로서 생계유지가 힘들다고 생각하여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나 그 동안 전통신 제작환경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내고 지켜봤던 본인만이 이 작업의 전통을 계승할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명감과 함께 가계의 가업 계승자라는 책임감이 다시 제자리를 찾게 해주었다고 한다. 꾸준히 작업을 해오면서 어려움이 있었으나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그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주고 도와주었던 선생의 부인으로, 전통신 제작 작업의 반려자임과 동시에 기능 이수자 역할을 훌륭히 해왔으며 선생은 이에 대해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 황해봉 선생은 가업을 이어 꾸준히 기능을 연마하여 제24회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할 정도로 우수한 기량을 갖추고 있음이 알려졌다. 황해봉 선생의 경우는 ‘화’보다는 ‘혜’ 제작에서 보다 더 뛰어난 기량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특히 칼을 사용하여 가죽을 재단하는 솜씨와 저모(豬毛)를 이용한 바느질하는 솜씨가 뛰어나며, 변(발을 감싸는 부분), 도리(발을 감싼 부분의 가장자리), 칙휘(신의 뒤꿈치) 부분의 처리가 매우 정교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기능을 인정받아, 2004년 2월 중요무형문화재 화혜장 부문의 혜제작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현재 황해봉 선생이 제작하는 신의 종류를 살펴보면 적석, 청석 등 석(舃)을 비롯하여, 태사혜, 운혜, 수혜, 당혜, 백혜, 흑혜, 기혜, 남아혜, 여아혜, 제혜, 발막혜, 유혜 등 거의 모든 혜의 종류를 제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흑목화와 백목화까지 제작하고 있어 거의 모든 전통신의 제작을 담당하는 유일한 기능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