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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혜장 황해봉

1952. 10. 12. ~ | 보유자 인정: 2004년 2월 20일

“요즘 혼인은 너무 서둘러서 메뚜기 혼례식이다. 혼삿날에 양화 고무신을 신거든. 내 딸은 고무신을 백날 신기느니보다 단 하루라도 꽃신을 신기겠다.” 그때서야 주문도 받지 않고 꽃신을 만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꽃신의 코를 바라보고 있으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잊어버린다. 아직 덜 된 꽃신은 점점 커져서 해도 없는 바닷가에 사공 잃은 배가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왜 농부들이 저렇게 아름다운 꽃신을 원치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신집 사람은 목덜미를 붉히며 말을 이었다. “그놈들은 꽃신 한 켤레 값이면 고무신 세 켤레 살 수 있다고? 난 그들이 고무신 백 켤레 갖다주어도 내 꽃신 한 켤레하고 바꾸지 않을 끼다.”

- [꽃신], 김용익 저, 돋을새김 발행, 2005 중

전통신을 만드는 장인, 화혜장

화혜장(靴鞋匠)이란 전통신을 만드는 장인으로, 조선시대 ‘화장’(靴匠: 신목이 있는 장화 형태의 ‘화(靴)’를 제작하는 장인)과 ‘혜장’(鞋匠: 신목이 없는 고무신 형태의 ‘혜(鞋)’를 제작하는 장인)을 통칭하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발간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중앙관청에 화장은 16명, 혜장은 14명이 소속되어 있을 정도로 신의 수요가 많았으며, 그 기능도 분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신 제작은 가죽을 주재료로 하여 수 십 번의 제작공정을 거쳐 이루어질 만큼 고도의 기술과 숙련된 장인의 솜씨로 완성된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장인 및 신과 관련된 각종 문헌이 등장하여 이를 통해 당시 생활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신의 역사

상고시대 우리나라의 신은 신목이 짧은 형태인 (鞋), 리(履)와 신목이 긴 화(靴)로 나뉜다. 이것은 생태 환경적으로 남방의 농경문화권의 혜(鞋), 리(履)와 북방의 기마유목문화권인 화(靴)가 공존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여국에서는 가죽신(革履), 마한에서는 풀을 재료로 한 초리(草履)와 혁교답(革蹻蹋) 등을 신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고구려인들은 누런 가죽신인 황혁리(黃革履), 검은 가죽신인 오피화(烏皮靴)와 붉은 적피화(赤皮靴)를 착용하였고 백제와 신라도 고구려와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에 화대(靴帶)라는 근이 붙어 있는 것이 그 시기의 특징이었다.

이밖에 남성용의 화와 달리 리(履)는 남녀 공용으로 착용하였는데 비단, 가죽, 삼 등으로 만들었다. 고려인들은 혁리(革履), 오혁구리(烏革句履), 조구(早屨), 초구(草屨) 등을 착용하였는데 특히 고려시대에는 왕과 백관의 관복제도가 시행되면서 관복용 신의 착용이 제도화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정비된 백관(百官)의 관복제도가 공표되어 있다. 백관들은 조복(朝服)과 제복(祭服)에 흑피혜(黑皮鞋)를 신고, 공복(公服)에는 1품에서 9품까지 흑피화(黑皮靴)를 신고, 상복(常服)에는 1품에서 3품의 당상관만 협금화(挾金靴)를 신도록 하였다. 이밖에 향리(鄕吏)는 공복에 흑피혜를 신고 상복에는 피혜(皮鞋)를 신었다. 의례 시에 왕은 적석(赤舃), 왕비는 청석(靑舃)을 착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의 신으로 착용된 화와 사대부, 서인들의 혜, 리가 다양한 재료로 제작되어 착용되었다.

조선시대 신의 종류

* 화(靴): 조선시대의 화는 문무백관들이 관복에 착용한 목이 긴 신으로 흑피화, 목화(木靴)가 남아 있다. 재료에 따라 흑피화, 흑화, 전피화, 기자화, 협금화, 백목화, 백화, 화자, 피화 등으로 명명되어 있다. 그 외에 방수용으로 유래된 수화자(水靴子)가 있다.


* 석(舃): 왕과 왕세자의 면복 착용 시, 그리고 왕비와 옹세자 빈의 적의 착용 시에 일습으로 갖추어 신었던 의례용 신이다.

* 혜(鞋)와 리(履): 일반적으로 혜(鞋)는 신울이 낮은 형태로 초(草)나 마(麻), 나무(木)를 제외한 신의 총칭으로 주로 상류층의 신을 의미한다. 재료에 따라 명칭이 다양하며 신코 부분의 형태에 따라 남녀용으로 구분된다.

* 삽혜: 남혜(男鞋)로 왕의 어이(御履)를 말한다. 왕실을 비롯하여 사대부 상류계급에서 착용하였다.

* 당혜: 당초문이 시문되어 유래된 여성의 신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조선시대 말기 신랑의 복장에 당혜가 포함되어 있어 남성용으로도 착용되었으며, 사대부 상류 계급의 신으로 보인다.

청석과 적석, 황해봉 작, 24cm

*운혜: 왕이나 왕비의 행차 시 말을 끌거나 의장구를 잡는 낮은 신분의 관원들이 착용하거나 병방의 장사들이 착용한 신이다. 반면 조선시대 후기에는 사대부들 이 평상복에 갓을 쓰고 운혜를 당혜와 함께 신는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궁중 발기에는 운혜가 여혜(女鞋)로 기록되어 시대적인 변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흑혜, 흑피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착용하나, 남자의 것은 신코가 넓고 뒤축이 높은 신 형태로 조선시대 말기에는 유생들의 보편적인 신으로 착용하였고, 여성용은 신코가 뾰족하고 높은 형태로 되어 있다.

*태사혜: 조선조 중기부터 사대부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던 신으로 태평시대를 상징하는 멋을 부린 신이었다.

*온혜: 안창에 융이나 담을 대어주어 따뜻하게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짚신과 미투리: 짚신은 삼한 시대부터 서민들이 즐겨 신던 신으로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 형태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번 변천되어 왔다. 닥나무를 주재료로 하는 미투리는 중인이 가장 많이 신었던 신이라고 한다.

*목극: 나막신으로도 불리는 목극은 우중(雨中)에 남녀 모두가 착용하였다.

*유혜: 비단을 사용치 않고 가죽만을 사용하는데 가죽에 기름을 먹여 물이 새지 않도록 하였다.

‘혼신의 힘’으로 5대째 가업의 맥을 잇고 있는 황해봉 선생

화혜장 기능보유자인 황해봉 선생은 1952년 10월 12일 생으로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에서 태어나 중학교 이후 어깨 넘어 할아버지(최초 중요무형문화재 화장(靴匠) 기능보유자인 황한갑선생)의 작업 모습을 계속 보고 자라왔다. 1967년 홍익전문대학 공예과를 입학하여 1년 수료하였다. 본격적으로 할아버지의 일을 전수받기 시작하였던 것은 1973년 군대 제대 후부터이며 현재까지 40여년을 전통신 제작 일에 열정을 바치고 있다. 특히 황해봉 선생의 집안은 화장 기능보유자인 조부 황한갑 선생뿐만 아니라 고조부인 황종수 선생을 비롯하여 증보부인 황의섭 선생, 증백조부인 황인섭 선생, 부친인 황등용 선생으로 이어지는 5대의 화장 가문이라 할 수 있다. 이 가문은 종로구 인사동과 지금은 청계천인 수표교와 초전골(현 을지로 5가)을 오가며 신을 만들었다. 수요가 많지 않았던 70년대 초반에는 주로 박물관이 주요 판로였다고 한다. 80년대 이후 복고풍이 불어 잠시 제작 형편이 좋아졌고 올림픽이 있었던 86년과 88년 즈음이 가장 호황기였다고 한다. 그 무렵까지는 수를 놓은 신이 많지 않았는데 차츰 수혜(繡鞋)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수를 수놓는 장인에게 부탁하여 ‘꽃신’이라는 명칭으로 제작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전에는 ‘갖신’이라 불렀다고 한다.

“꽃신의 묘미는 곡선을 그리며 날렵하게 올라간 신발코에 있습니다. 인체공학상 평평한 신발은 코의 곡선을 따라 앞으로 걸을 때 벗겨지지 않고 나아가게 됩니다. 왼쪽 오른쪽 구별이 없는 듯 하지만 조금 신다 보면 발모양이 나서 제짝이 생겨납니다. 우리의 전통신은 사람이 신에 맞추는 게 아니라 신이 발 모양에 맞게 서서히 변하면서 사람에 맞추어 가는 게 특징이죠.”

신 제작의 성수기는 결혼 시즌인 3월과 4월 사이이며 주로 아동용과 신부용이 많았다. 그러나 그 수가 한 달에 10켤레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전통신을 제작하는 장인의 위치에 있었던 선생도 생계를 위하여 청년시절 신발 제작을 잠시 놓았다고 한다. 영세한 작업환경과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가장으로서 생계유지가 힘들다고 생각하여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나 그 동안 전통신 제작환경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내고 지켜봤던 본인만이 이 작업의 전통을 계승할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명감과 함께 가계의 가업 계승자라는 책임감이 다시 제자리를 찾게 해주었다고 한다. 꾸준히 작업을 해오면서 어려움이 있었으나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그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주고 도와주었던 선생의 부인으로, 전통신 제작 작업의 반려자임과 동시에 기능 이수자 역할을 훌륭히 해왔으며 선생은 이에 대해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

황해봉 선생은 가업을 이어 꾸준히 기능을 연마하여 제24회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할 정도로 우수한 기량을 갖추고 있음이 알려졌다. 황해봉 선생의 경우는 ‘화’보다는 ‘혜’ 제작에서 보다 더 뛰어난 기량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특히 칼을 사용하여 가죽을 재단하는 솜씨와 저모(豬毛)를 이용한 바느질하는 솜씨가 뛰어나며, 변(발을 감싸는 부분), 도리(발을 감싼 부분의 가장자리), 칙휘(신의 뒤꿈치) 부분의 처리가 매우 정교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기능을 인정받아, 2004년 2월 중요무형문화재 화혜장 부문의 혜제작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현재 황해봉 선생이 제작하는 신의 종류를 살펴보면 적석, 청석 등 석(舃)을 비롯하여, 태사혜, 운혜, 수혜, 당혜, 백혜, 흑혜, 기혜, 남아혜, 여아혜, 제혜, 발막혜, 유혜 등 거의 모든 혜의 종류를 제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흑목화와 백목화까지 제작하고 있어 거의 모든 전통신의 제작을 담당하는 유일한 기능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주요작품

(맨 뒤) 적석, 26cm, 왕이나 왕세자의 제복인 면복을 착용할 때 신는 의례용 신이다.
(맨 뒤) 청석, 25cm, 왕비나 세자빈의 법복인 적의를 착용할 때 신는 의례용 신이다.
(중간) 태사혜, 26cm,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남성들이 평상복에 신었던 신이다.
(중간) 수혜, 24.5cm, 조선시대 여인들이 신었던 신이다. 비단에 수를 놓아 장식한 신울이 낮은 신으로 꽃신이라고도 한다.
(맨 앞) 돌쟁이 남혜, 16cm, 여혜, 15cm

제작과정

혜의 제작과정을 살펴보면 여러 겹의 광목이나 모시를 붙인 백비 위에 공단을 붙여 신울(발등을 감싸는 부분)을 준비하고 소가죽으로 신 밑창을 만든 뒤 신울과 밑창을 맞바느질하여 연결한다. 이때 중심이 틀어져 신코가 비뚤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나무로 된 신골을 박아 신의 형태를 잡아 주면서 완성한다.

제작에 필요한 도구로는 백비판, 칼판, 창 뚫는 판, 풀널, 풀대, 방망이, 큰칼, 작은칼, 송곳, 명주실, 면사, 저모, 서개, 배기쇠, 수포석, 밀, 신본, 골, 쐐기, 버팀목, 꿰백이, 숫돌, 무릎뱉기, 반계, 가위, 까래본 등 다양한 도구들이 사용된다.

1) 신울 마름질

2) 밑창 만들기

3) 도리치기

4) 신울과 밑창 꿰매기

5) 신골박기

약력
1952년
출생
1979년
인간문화재 공예작품 전시회 장려상
1983년
서울올림픽 전통공예품 경진대회 입상
1994년
서울시 자랑스런 시민상 수상
1995년
한국복식 이천년전 초청 시연회
1997년
휴스턴 국제영화제 한국 전통문화부문 은상 수상
1997년
제22회 전승공예대전 특별상 수상
1998년
제2회 한복의 날 기념 문화관광부 초청 시연회
1999년
제24회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수상
200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6호 화혜장 기능보유자 인정
2005년
프랑스 파리 국제박람회 출품 및 시연
2006년
KBS 드라마 <황진이> 꽃신 제작
2007년
대한민국 국새제작 실행위원
2009년
주일 한국문화원 한일 전통공예 교류전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발행일 201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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